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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천시뉴스]화문석의 대를 잇는다
작성자 강화도령 (ip:)
  • 작성일 2017-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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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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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문석의 대를 잇는다
‘강화도령’ 박윤환 대표
 

1960, 70년대 화문석자리는 ‘머스트 해브(must have) 아이템’이었다. 냉장고와 선풍기가 귀했던 시절, 땀을 식혀주는 일등공신이었다. 전통 생활용품이자 공예품인 화문석은 시대가 발전하면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한때 강화에는 화문석 5일장이 섰을 정도로 번창했다. 이제 화문석자리는 뒷방으로 밀려나 있는 신세가 되었다. 희미해진 화문석 시장에 한줄기 빛이 되기 위해 박윤환 대표는 ‘강화도령’으로 다시 고향 강화로 되돌아왔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207-3번지에는 ‘농업법인 강화도령 화문석’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이곳은 ‘농업법인 강화도령’ 공방이다.
‘찰삭 찰삭 ~’ 쇠구슬이 부딪히는 듯 맑은 소리가 공방에 울려 퍼진다. 공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첫 소리다. 그 소리는 화문석자리가 넓어지고 있는 소리다. 앉으면 엉덩이가 시원해지고 만지면 손이 시원해지고 누우면 등이 시원해지는 화문석자리는 왕골의 겉대와 속대가 한줄 한줄 더해지며 엮어지는 그 소리로 완성된다. 쉼 없이 손을 움직이는 이들은 화문석 장인들이다.




장인들의 손이 쉼 없이 줄을 번갈아 맞물린다. 그렇게 완성된 화문석자리가 공방의 벽면을 가득 메웠다. 둘둘 말아 세워진 화문석자리에는 왕골 특유의 옅은 갈색을 바탕으로 형형색색의 문양이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 화문석자리를 바라보는 박윤환 대표의 표정이 진지하다.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어요.”
크기에 따라 문양과 색상이 다양하기 때문에 화문석자리는 그에게 보물이나 다름없다. 지금 장인들이 이 공방에서 만들고 있는 자리는 환자용이다. 오래 누워 지내야하는 환자들은 욕창이 생기기 쉽다. 또 누워있는 시간이 많은 갓난아기들에게도 요즘 같은 더위는 참기 힘든 고통이다. 통풍이 잘되고 시원해 욕창과 땀띠 방지에 좋은 화문석자리를 크기별로 만들고 있다, 하루 8시간씩 3명이 열흘 정도 작업을 해야 작은 화문석자리 하나가 완성된다.



인내심으로 공들여 완성한 화문석자리를 펼쳐 놓는 순간 한 폭의 그림이 튀어 오른다. 붉게 떠오른 태양과 숲에서 뛰어 노는 사슴과 길조(행운의 새), 그리고 다양한 문양이 모자이크 된 듯 멋스럽다. 원형과 사각형의 방석도 형형색색 화려하다. 수작업으로만 완성되는 화문석은 어느 것 하나 동일한 제품이 없다.
“왕골은 씨뿌리기부터 수확하기까지 그리고 세(등분) 조각으로 쪼개기, 건조과정, 화문석 짜기까지 손길이 무려 60만 번은 오갑니다.”
잘 나가던 외국계회사를 그만두고 박 대표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 강화로 되돌아 왔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를 이어 화문석에 인생을 걸었다. 아버지 박성찬(64) 씨가  그때를 떠올리며 설명한다.
“잘 다니던 회사를 접고 다 죽어가는 화문석 시장에 뛰어드니 반대했지요. 화문석은 만들기부터 쉽지 않아요. 그리고 많은 화문석자리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 팔기도 쉽지 않지요.”

박윤환 대표



박성찬 씨는 아내 유인순 씨와 결혼 후 1981년 강화읍에 ‘삼성돗자리’를 창업했다. 어느새 40년이 넘었다. 화문석의 등급을 매기는 전문가인 그는 강화 화문석 시장의 80%를 좌지우지 할 만큼 큰 상인이다.
좋은 화문석은 집안의 재산이던 시절도 있었다. 그의 집에는 아직도 30년이 넘은 자리가 보관돼 있다. 거의 문화재급이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애지중지하던 화문석자리를 내다팔기도 했다.
“당시 최고급 20여개 사놨는데 현재는 몇 개 안 남았어요. 누가 비싼 값을 쳐준다고 해도 집사람에게 ‘내다 팔지 말고 그냥 갖고 있자’고 말했습니다.” 그는 귀한 화문석자리를 가보로 남길 생각이다.

부모님과 함께



아버지의 안목을 이어받은 박윤환 대표는 대학 1년 때인 1999년 부모님 가게의 홈피 운영을 하면서 화문석의 시장성을 확인했다,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 강화로 아예 들어왔다.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2년 동안의 시장 조사 후 올해 1월 ‘농업법인 강화도령 화문석’을 창업했다.
화문석 시장은 과거에 비해 100분의 1로 줄었다. 수요가 줄어든 만큼 만드는 장인들의 수도 줄었다. 현재 강화에는 총 100명 이내 장인들이 있다. 전통공예인들이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다. 그래서 공방을 운영하게 됐다, 현재 그의 공방에서 함께 일하는 장인은 5명이지만 3명의 스탭과 공방 밖에서 도와주는 장인 80여명이 있다. 강화의 장인들이 모두 모였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강화에서 유일하게 가업을 잇는 그는 화문석의 전통을 보존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그는 고가에 임금에게 진상하던 전통 왕골공예품을 명품화 시켜 세계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강화화문석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소장품이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재료와 디자인, 색상에 차별화를 두면서 승부를 걸고 있다.
“강화화문석을 새롭게 해석해서 문화와 종교를 접목 시키려 합니다. 아시안 엔틱으로 대한민국을 널리 알릴 것입니다.”

김민영 I-View객원기자 gem07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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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ews.incheon.go.kr/publish/php/articleview.php?idx=9851§ion=8&diaryDate=2014-07-15&chapte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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